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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지 않는 시체 방부 기술 소녀시신주사한방

맛있는 피자와 파스타, 멋진 디자인과 색상의 각종 명품 말고도 이탈리아에는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 잡는 특별한 기술이 있다. 바로 '썩지 않는 시체 방부 기술'이 그것.

지난 11일 MBC <신비한TV 서프라이즈> 여름특집 '소녀의 비밀' 편에서는 썩지않는 시신 '로잘리아 롬바르도(Rosalia Lombardo)'에 관한 이야기가 방송됐다. 로잘리아 시신은 이탈리아의 한 성당에 안치돼 있다.

기자는 지난 24일 세르지오 페스카또리(Sergio Pescatori) 베로나 문과대학 전 학장과 고고학자인 가브리엘레 로씨 오즈미다(Gabriele Rossi Osmida )로부터 이탈리아의 특별한 시체 방부 기술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들의 이야기는 MBC 방송의 '소녀의 비밀' 편보다 상당히 자세하고, 구체적이었다.

두 전문가는 "썩지 않은 시체들이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 지방부터 북부의 베네토 지방까지 전역에서 두루 발견됐다"면서 "이는 이탈리아가 세간에 알려진대로 세계 최고의 인체해부학과 생물학 기술을 보유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설명했다.

이탈리아 전역에 퍼져 있는 '썩지 않은 시체들'

이러한 시신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시칠리 섬 팔레르모(Palermo) 쿠바구(Quartiere Quba)에 위치한 '산타마리아 델라 빠체' 성당 (Santa Maria della Pace. 평화의 성 마리아)과 카푸치니 수도원의 시신들이다.

16세기 카푸치니 수도원 건물에는 중세부터 보관해온 카푸치니 수도회 소속 수도사들의 썩지 않은 시신들이 보관돼 있다. 이 곳은 프랑스 유명작가 모파상(1850~1893)이 생전에 서너번 방문했을 만큼 널리 알려진 곳이다. 이 수도원이 최근 다시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게 된 건 2009년에 발견된 일명 '잠자는 공주' 로잘리아 시신 때문이다.

 

 

 

이곳에 보관된 시신들은 대부분 400여 년 된 것들이지만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보관돼 있다. 시신이 양호한 상태로 보관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방부처리 기술이 특별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많은 수도원과 성당들이 그렇듯 건물내부에 자체적인 묘지기능을 가지고 납골당을 운영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반에 이르러 위생상의 문제로 성당과 수도원 내의 묘지·납골당 기능은 법적으로 금지된다.)

이곳에는 1500년 10월 16일 숨진 실베스트로 다 구비오(Silestro da Gubbio)수사의 시신부터 1920년 12월 6일 숨진 로잘리아의 시신까지 수많은 시체가 빼곡하게 여러 방에 나누어져 있다. 이들은 긴 세월동안 인위적인 처리 없이 숨을 거둘 당시 모습 그대로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고 있다.

당시 방부 처리에는 상당한 비용이 소요됐기 때문에 처리된 시체들은 상류층에 속한 고위성직자, 귀족, 부유한 상인이거나 그 가족들이 대부분이었다. 이 시체들은 단정히 앉아 있거나 누워 있거나 혹은 꼿꼿이 서 있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와 신분을 상징하는 옷들을 입고 있다.

당시 시신 방부처리는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쳤다고 한다.

'시신 내부의 장기를 모두 제거한다. -> 그후 약 1년간 신체의 물기를 없애 바짝 건조시킨다. -> 방부처리를 위해서 초산으로 몸을 모두 닦아낸다.-> 마른 짚을 넣어 몸통을 채운 뒤에 각자의 옷을 입힌다.'

한편 전염병이 만연했을 시기에는 시체를 비소나 석회물로 씻는 등 다른 방법도 첨가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곳에서 가장 유명한 일명 '잠자는 공주'는 복도 끝 왼쪽으로 들어가면 나오는 산타 로잘리아 예배당에 안치돼 있다. 로잘리아는 1918년 팔레르모에서 태어나 1920년 12월 6일 폐렴으로 숨졌다. 당시는 법적으로 성당내 시신과 납골안치 금지령이 내려질 무렵으로, 성당에 안치된 마지막 그룹으로 추정된다.

로잘리아의 시신 방부처리는 어린 딸을 잃은 아버지의 강한 염원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로잘리아의 몸은 수도원내의 다른 시신들처럼 미이라 처리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당시 이 분야의 권위자였던 '알프레도 살라피아'(Alfredo Salafia, 1869~1933) 교수의 도움을 받았고, 살라피아 교수는 로잘리아에게 단 한 대의 그 어떤 주사를 투입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 주사 한 방으로 로잘리아의 시신은 현재 세계역사상 가장 신선한(?) 시체로 평가 받고 있다.

로잘리아 시체가 다시 주목 받게 된 것은 살라피아 교수의 자료를 정리하던 살라피아 가족들과 학계가 그가 남긴 연구메모를 발견하고 로잘리아의 관을 열어보게 되면서다. 그게 바로 2009년 일이다.

로잘리아의 얼굴은 숨을 거둘 당시의 어여뿐 아기의 모습 그대로였다. 아니, 마치 어제 막 잠이 든듯 피부에는 윤기가 흘렀다. 곱슬머리도 그대로이고 머리카락의 윤기도 그대로였다. 도저히 93년 전의 시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연구진들의 방사선 촬영에 의하면, 로잘리아의 모든 장기, 특히 뇌, 간, 폐 등은 완벽하게 그대로 보존된 상태라고 한다.

아무리 뛰어난 방부처리를 하더라도 세월이 흐르면 얼굴은 해골이 되고 머리카락은 없어지는 것이 일반적 상황인데, 살라피아 교수의 주사 한방으로 로잘리아의 시신은 피부, 손톱, 머리카락, 장기까지 모든 게 완벽하게 그대로 보존되었다는 것이다.

살라피아 교수는 저명한 고생물학자로  미켈란젤로 첼레시아 추기경(N.Celesia)과 프란체스코 크리스피(F.Crispi. 1818~1901. 시칠리를 대표하는 정치가)등을 비롯해 역대 바티칸의 성직자들과 이탈리아 유명인사들의 시신방부처리를 담당한 것으로 유명하다.

살라피아 교수가 기록해둔 자료에 의하면, 로잘리아에게 주입된 화학물질은 다음과 같다.

박테리아를 죽이는데 사용한 포르말린, 장소의 기후조건에 따라 생기는 세균을 막는 알코올, 지나친 건조함을 막는 글리세린, 곰팡이 균을 막을 살리실 초산, 단단함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아연염.

단테의 후원자인 칸그란데의 특별한 시신

 

 

이러한 방부처리 시신들은 남부 시칠리 섬외에 북부 베네토 지방에서도 종종 발견돼 세계학계를 놀라게 만들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베로나(Verona)도시에서 발굴된 '칸그란데 스칼라 1세'(Kandrande I della Scala. 1291~1329)의 시신이다. 그는 단테의 후원자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칸그란데는 베로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델라 스칼라' 귀족가문으로 기벨린(Ghibelline) 혈통이다.

칸그란데는 화통하고 자신감 넘치는 인물로 명연설가로도 정평이 나 있다. 그는 대의를 우선시하는 통치자였기 때문에 그의 생전에 폭동이나 반란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로 인해 역사가들로부터 모범적인 선군으로 회자되는 인물이다.

그는 특히 35세의 단테(Dante Alighieri)가 피렌체에서 추방당했을 당시 그를 베로나로 불러 저술작업을 돕는 등 '단테의 평생 후원자'로 유명하다. 칸그란데는 단테의 '신곡' 천국편에 등장하는 실존인물이기도 한데, 단테는 칸그란데를 향한 감사와 존경을 자신의 작품에 그대로 드러내 감사를 표현하기도 했다.

38세에 숨을 거둔 칸그란데는 출중한 미남형이었다고 역사에 기록돼 있는데, 2004년 발견된 그의 시신은 그러한 이야기들이 사실임을 보여줄 정도로 잘 보존돼 있었다. 그는 계란형 얼굴의 미남으로 173cm의 신장이었음이 밝혀졌다.

이처럼 잘 보존된 시신들은 이탈리아의 뛰어난 시체 방부 기술에서 연유한다.

그도 그럴 것이 1094년 십자군 전쟁 참여후 지중해상권을 장악하여 막강한 부를 축적한 베네치아 공화국은 종교와 정치간의 정경분리정책을 실시함으로써 당시 유럽의 가장 진보적이고 진취적인 학자들에게 연구기회를 제공했다. 그 결과 1222년에 파도바(Padova)에는 세계 최초로 대학이 세워졌고,1543년에는 해부학의 창시자인 '안드레아 베살리우스'에 의해 해부학이 본격적으로 연구됨으로써 유럽의 다른 지역에 해부학교실이 열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후 1595년에는 실제로 인체실험이 대학내에서 이뤄졌다.

오늘날 미이라 시신들을 이탈리아 곳곳에서 접할 수 있게 된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인체해부학에서 비롯된 특별한 방부 기술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