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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라] 싫어하면서 뉴스만 뜨면 클릭하는이유????

1989년 배우 강수연이 시구의 등장인물을 바꾸었고, 2005년 홍수아가 시구의 개념을 바꾸었으며, 2013년 클라라의 시구는 이전의 시구 공간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무엇보다 클라라의 시구는 인터넷 시대에도 연예인의 신화화를 이루면서도, 급속하게 신화화의 붕괴 현상을 목도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클라라 사태는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정치인에서 연예인으로
 
1982년 프로야구 원년 개막전 시구자는 3S 정책의 전두환 대통령이었다. 이후 1983년 체육부장관 이원경, 1984년 염보현 서울시장 등 장관, 시장, 국회의원 등이 '단골로 시구했고 그 수가 그간 50여 명이 넘는다는 말도 있다. 1989년 광주 개막전에 배우 강수연이 시구자로 나선 것이 연예인 시구의 시초였다. 이로써 시구에는 스타들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1992년 최신실, 1996년 탤런트 채시라, 1998년 탤런트 한석규, 1999년 배우 최민식 등이 시구자가 되었다. 2000년대 들어서 연예인 시구가 대폭 늘었다. 2000년 개그맨 이휘재와 배우 이나영, 2002년 장나라, 2003년 가수 엄정화와 탤런트 김원희, 2004년 가수 비와 방송인 김제동, 2005년 배우 이미연과 개그맨 정준하 등이 대표적이다. 그것은 프로 야구의 확장과 맞물려 있었다.
 

 

 

 

 

 

 

 

 

 

 

 

 

 

 

 

 

 

 

2005년은 개념 시구가 등장한 해였다. 홍수아는 바른 복장에 구질까지 좋은 시구를 선보여 양복이나 힐을 신고 던지는 패대기 시구와 다른 면모를 보였다. 홍수아가 보스턴 레드삭스의 에이스였던 페드로 마르티네스를 연상시킨다는 평가였다. 그 뒤로 한동안 실제 선수들의 투구폼과 유사한 시구가 이어졌다. 박신혜, 윤정희, 스테파니, 소녀시대 유리는 모두 이러한 계보를 잇는 것으로 회자되었다. 티파니와 제시카는 이른바 패대기 시구로 여전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무엇보다 예전에는 개막전이나 한국시리즈와 같이 굵직한 행사에서 시구가 선을 보였지만, 이제는 수시로 시구가 등장하고 있다. 톱스타만이 시구를 할수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또한 남성들보다는 여성이 이제 압도적으로 많아졌다. 한동안 걸그룹들이 야구장도 휩쓸었다. 지난 5월 가운데 시구에 참여했던 여자 연예인은 방송인 강예빈, 방송인 박은지, 개그우먼 김지민, 배우 정시연, 배우 클라라 그리고 헐리우드 스타 미셸 로드리게스도 있었다. 남자로 농구선수 김태술, 가수 송대관, 배우 장항선 등도 시구를 했지만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어떻게 여성 시구가 늘었나
 
그렇다면 왜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아진 것일까. 그것은 일단 정치인들이나 관료들이 마운드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더 이상 프로야구는 관공서 행사가 아니라 시민들의 스포츠로 완전히 자리를 잡았음을 뜻한다. 이전에는 스포츠는 3S 정책의 대상이 되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인이나 관료들의 권위를 얻으려고 했고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권력자들의 시구였다. 여기에 당대의 최고 스타들을 시구자로 선정하여 권위에 의존하려 했다. 
 
하지만 이제 프로야구는 스스로 홀로 자신의 자리를 완전하게 잡았다. 누구에게 시구를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시구를 부탁해야할 상황이 되었다. 이전에는 복장이 어떠해도 시구에 참여해주는 것이 영광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시구 기회를 받는 것이 오히려 크게 감사해야할 일이다. 왜냐하면 당장에 화제가 되기 때문이다. 시구의 공간은 무대의 공간이 되었다. 이제 대중 스포츠이기 때문에 수시로 시수를 통해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거나 팬서비스를 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여성들이 많아졌고 복장도 이제 갖춰 입는가 하면 제대로 된 시구를 요구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이를 개념 시구라고 불렀다. 이는 예의를 갖추어야한다는 인식이 확고해진 것이며 야구의 달라진 위상을 대변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시구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그 컨셉으로 인해 심리적 압박감을 갖기도 한다. 하지만 몸을 전면으로 드러내는 전략은 분명 욕을 먹을 게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몸매 시구가 아니다
 
홍수아는 지난 7일 KBS  <굿모닝 대한민국> 의 ‘시구특집’에 나와 “시구는 공을 던지는 것이지, 몸매를 자랑하는 게 아니다”라고 했다. 사실 클라라에 대한 직격탄이었다. 이외에도 클라라와 다른 개념 시구를 구사하는 여자연예인들이 이어졌다. 이는 클라라는 아래로 누르면서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행위들이었다. 사실 시구를 통해 자신들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려는 것은 다른 바 없었다.
 
일본 프로야구에서는 모델 겸 탤런트 단 미쓰가 수영복만 입고 시구자로 나서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 정도로 예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클라라는 건강미를 드러내기 위해 레깅스를 입었고, 복근을 강조하려 디자인을 의뢰했다고 밝혔다. 클라라는 야구복에 야구모자를 쓰고 공을 던지는 폼도 괜찮았다. 적어도 패대기는 아니었으며, 청바지에 티셔츠을 입거나 힐을 신고 오지도 않았다. 가슴을 드러나지 않도록 앞섶을 처리했다.  
 

 

 

 

 

 

 

 

 

 

 

 

 

 

 

 

 

 

 

 

 

 

그러나 클라라 앞에는 카메라가 있었다. 그것도 텔레비전 영상 카메라가 아니라 사진 카메라였다. 영상 시대에 여전히 사진 카메라는 살아 있었다. 텔레비전 영상은 클라라의 몸을 섹시하게 잡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순간의 미학, 사진 카메라는 잡아냈다. 카메라 셔터를 누른 그는 투구를 하기 위해 와인드업을 하려는 순간 상반신과 하체가 드러나는 클라라의 전면 사진을 얼굴 표정과 함께 찍어냈던 것이다. 방송 카메라는 이 각도를 잡아내지 못했으며, 다른 카메라들도 놓쳤다. 유독 클라라를 유명하게 만든 그 사진 한 장만이 수없이 복제, 클릭 당했다. 사진이 그렇듯이 그것은 클라라의 신화화 였다. 찰나의 이미지이지만 무엇인가 다른 게 존재할 것 같은 여운을 남겼다. 인간의 눈이 잡아낼 수 없는 그 사진. 그것이 클라라 신화화의 시작이었다. 수십 년 전 여신으로 장사를 하던 할리우드의 풍토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디지털 환경을 통해 부활했다. 
 
사실 그것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것임에 분명했다. 그 사진은 현실의 본질을 드러내기 보다는 현실과 이미지의 불일치를 통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현상을 낳았다. 무엇보다 클라라는 시구 자체가 아니라 인터넷을 중심으로 스타화의 구도가 바뀌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전에는 지상파를 중심으로 방송에서 스타가 된 이들이 찾던 시구공간이었다면, 이제는 거꾸로 인터넷을 통한 이미지가 스타로 만들고 그들을 지상파를 포함한 많은 매체들의 인기 출연자로 탄생시킨다. 바로 루키의 탄생공간이지만, 그것은 인터넷과 연동되어 있을 때만 가능하다. 시구자가 인터넷 검색으로 오르내리는 것은 대수가 아닌 바에야 클라라의 점령은 당연한 것이었다. 

 

 

 

 

 

 
신화시대의 종말?
 
순간의 찰나는 수많은 이들을 갈증 나게 했다. 그 한 장뿐이라니. 이후 사진이 만들어낸 허상은 어떤 클라라의 기사라도 클릭하게 만다는 마법을 부렸다. 그 클릭을 통해 클라라의 속 실체를 더 찾는다면 그건 클라라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 렌즈에게 물어야 한다. 아니 그 사진들을 찍은 이에게 물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그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진 기자는 바로 우리의 욕망을 대변했기 때문이다. 
 
그 사이 클라라가 그간 예능 프로그램에서 말한 여러 가지내용들이 사실과 다르거나 서로 모순되어 거짓말 논란에 휩싸였고, 급기여 울면서 사과를 해야 한다. 그런 모습은 한 장의 사진으로 벌어진 신화화를 유지하려는 행동 때문에 벌어진 것에 다름 아니었다. 좋은 이미지를 유지하려는 의도는 잘 매니지먼트 되지 못한 사례이기도 했다. 그녀는 갑자기 떴기 때문일까. 서태지의 신화화도 깨어지는 상황에서 클라라는 자신의 이미지를 신화의 상태로 남겨 두고 싶었던 것이다. 클라라의 사례는 시구를 통해 대중적 주목을 받은 것이 바로 인터넷 검색 순위를 통해 주목을 받는 것과 같이 덧없을 수도 있다는 점을 담고 있다. 
 

 

더구나 많은 방송 매체에서는 클라라의 그 성적 이미지에 대한 호기심과 탐색 심리를 십분 활용했다. 배우는 배우로 말해야 한다. 배우로 말하는 것은 바로 작품이다. 예능에 배우는 가치를 갖지 못한다. 특히 토크쇼는 신화와 연기가 아니라 진실성이 우선해야 한다. 새삼스런 이야기지만 배우가 왜 예능 프로그램에 그렇게 많이 나서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녀에게 주어지는 연기란 결국 사진의 역후광에 다름 아니다. 클라라는 SBS 드라마 <결혼의 여신>에서 하버드 출신의 앵커 역으로 나왔지만, 성격파 배우는 물론 전문직 여성의 삶을 보여주기 보다는 자신의 육체성을 내세운 불륜녀로 출연했다. 하버드는 그냥 장식이 아니며, 영어 발음 섞는다고 가치를 발현하는 것은 아닌데 말이다. 그 파편적인 몸 이미지에 존재적 가치마저 사라졌다. 순간의 찰나로 뜬 자 반드시 순간이 아닌 연속 활동을 하는 순간 곧 붕괴되니 좋아할 일이 결코 아닌 것이다.

 
찰나의 운명
 
시구장은 거만해졌다. 과거에는 정치인과 스타들을 불러다가  그들의 권위를 빌려 스스로 높이고 주목을 받았으면서도 어설픈 시구 동작을 통해 그들의 권위를 우습게 만들었다. 이제는 시구장이 복종을 요구하고 있으며, 성의 눈요깃거리장소로 변했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클라라의 이미지는 계속 만들어질 것이었다. 그것은 우리 욕망이 만들어낸 신기루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클라라의 실제가 드러나는 것은 시간 문제였고, 클라라는 그것이 두려운 것이었다. 어떻게 잡은 기회였는데 말인가. 더구나 동포의 딸이나 아들이 몸이 아니면 배우 생활을 할 수 없다니 슬픈 현실이다. 오늘도 포털 컨베이어밸트에 올라갈 신화적인 육체의 찰나를 사냥하기 위한 카메라의 렌즈는 계속 번뜩이고 있다